활동소식

누가 위키리크스를 영웅으로 만들었나

2010.12.06

‘위키리크스 신드롬’이라고 할 만하다. 폭로전문 사이트 또는 내부고발 전문 사이트라고 국내에 소개되고 있는 ‘위키리크스(http://wikileaks.org/)’가 올리고 있는 기밀자료들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위키리크스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6년이지만, 지금처럼 크게 주목받은 것은 지난 4월부터이다. 그 때 위키리크스는 미군의 아파치 헬리콥터 2대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공개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연 이어서 위키리크스는 이라크전, 아프간전 관련 기밀문서들도 폭로했다. 최근에는 미 국무부와 세계 각국의 미국 대사관 사이에 오고 간 외교전문들을 공개해서 파장이 일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미국의 ‘정보 은폐’

이런 위키리크스의 활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 쪽에서는 ‘일종의 테러행위’라고 비판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들의 ‘알 권리’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위라며 옹호하고 있다. 이런 논쟁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71년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미 국방성의 내부고발자가 베트남전 관련 기밀문서를 뉴욕타임스에 전달하여 뉴욕타임스가 이를 보도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큰 논란이 있었지만, 미국 법원은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대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알 권리’는 민주주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하고 있는 위키리크스의 활동이 전적으로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위키리크스의 활동을 평가하려면, 위키리크스가 지난 4월에 공개한 이라크 민간인 사살 동영상을 한번 볼 필요가 있다. 동영상을 보면 충격적이다. 미군 헬기는 정확한 확인도 하지 않고 막연한 추측만으로 12명의 사람들을 사살했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총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있던 로이터 통신 기자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 미군 헬기는 부상당한 사람을 차에 태우려던 사람들까지 죽였다. 그 차에는 어린이 2명도 타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헬기에 달려있던 카메라에 찍혀 동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이 동영상을 공개하지 않고 은폐했다. 로이터 통신에서 정보공개법에 따라 정보공개청구까지 했지만 공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동영상은 미군에서 정보분석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브래들리 매닝 일병이라는 내부고발자에 의해 위키리크스에 전달됐다. 그리고 위키리크스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발단은 바로 미국 정부의 ‘정보은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내부고발자인 브래들리 매닝 일병만 구속시켰고, 위키리크스를 비난하고 그 활동을 막는 데에만 힘을 쏟고 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이라크전이나 아프간전 과정에서 저지른 여러 잘못들을 은폐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위키리크스가 지금처럼 주목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밀주의 있는한 지지자 늘어날 것

미국 정부가 잘못을 은폐하려고 했기 때문에 위키리크스는 시민의 알 권리를 위해 싸우는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은 이런 영웅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과거에는 아무리 내부고발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개 뉴미디어가 미국과 같은 강대국 정부와 맞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위키리크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의 폐쇄성과 불투명성이 극복되지 않는 이상, 위키리크스의 활동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 것이다. 거부감을 표명하는 사람 못지않게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올 것이다. 결국 위키리크스를 키운 것은 테러리즘도, 위키리크스 자신도 아닌 정부의 비밀주의이다. 미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는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 글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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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 외교기록공개 파장을 분석한다.

2010.12.02
투명사회를위한 정보공개센터
전진한 사무국장

연평도 포격 이후 한반도에 전쟁의 공포가 퍼져가고 있다. 서해에는 미 항공모함이 떠 있고, 북한도 이에 대응해 연일 포격훈련을 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쟁터질 것을 두려워하면서 한숨을 쉬고 있다. 이것이 2010년 12월 한국의 현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런 위기상황을 국민들의 현명한 지혜와 의지로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한반도가 이렇듯 전쟁위기의 혼란을 겪는 와중에 전세계는 다른 것으로 충격에 빠져있다. 바로 위키리크스가 공개하고 있는 외교 비밀문건들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전세계를 상대로 사찰하고 있는 것들이 폭로 되고 있고, 각국의 외교 뒷담화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도 북한 및 중국과 관련되어 수많은 외교 기록들이 공개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북의 고위관료들이 우리나라로 망명했다는 기록, 지난 해 남북회담을 추진했었다는 기록, 북한이 2015년 내에 붕괴할 것이라는 기록, 대한민국 외교 2차관이 중국 우다웨이를 가장 무능한 관료로 비하했다는 기록 등은 그 하나하나가 국제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낳을 내용들이다. 

미국은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샌지를 간첩죄로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고, 인터폴은 각국에 적색경보를 내리고 체포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또한 그의 성추행 경력을 거론하면서 도덕성에 상처를 주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는 이미 각국에 치명타가 될수도 있는 25만건에 달하는 외교기록을 확보하고 있으며, 줄리언 어샌지를 보호해주고 있는 수많은 국가와 단체가 있어 이런 혼란은 당분간 계속 지속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번 사건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 해보자. 위키리크스는 어떤 단체이고, 그들이 공개하고 있는 외교비밀기록은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이며 우리의 고민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짚어 보도록 하겠다. 


우선 위키리크스는 필자가 일하고 있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www.opengirok.or.kr) 및  미국의 민간 NGO인 NSA(National Security Archive) 등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정부로부터 기록을 입수하여 자료의 원본 및 진본 등을 언론과 자신의 사이트에 공개 및 공유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정보공개센터와 NSA는 정보공개법에 따라 정보공개청구라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확보한 정보를 대상으로 하고, 위키리크스는 내부제보, 해킹으로 추정되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공개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가끔 공공기관의 담당자들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공개 결정을 받아 블로그에 공유하고 있는 것에도 항의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 국가기록원은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기록을 블로그에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엽기적인 주장까지 한 적이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기록을 생산하고 국민을 상대로 저작권을 운운하는 것에 매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가 공개하고 있는 기록들의 대부분은 외교비밀기록 및 비공개기록들이다. 바로 이점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흥분하고 있는 것이고, 줄리언 어샌지를 어떻게든 체포하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위키리크스의 서버는 스웨덴 및 아이슬란드 등에 걸쳐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미국 등 일부 국가가 강제적으로 처리할 방법도 없다. 

그러면 외교 비밀 및 비공개기록은 무엇인지를 분석해봐야 한다. 절차적 정당성을 잃어가면서 까지 위키리크스가 공개하고자 했던 의도는 무엇일까? 우선 비밀기록의 정의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비밀기록을 규정하고 있는 보안업무규정을 보면 “비밀이라 함은 그 내용이 누설되는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유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국가 기밀로서 이 영에 의하여 비밀로 분류된 것을 말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말 그대로 ‘국가안전보장’에 유해한 결과를 초래될 경우 비밀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및 각국의 비밀 조항도 이와 유사한 양상을 띄고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비밀’이라는 위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국가안전보장이 아닌 정권안전보장을 위해 쓰이는 경우가 더욱 많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민간인 사찰과 관련 기록을 디가우저로 파기하는 사건들이 벌어졌지만 이런 기록들을 대부분 비밀기록 및 대외비 기록이라는 명목으로 관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기록들을 합법적인 수단으로 공개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에 이번 사건을 단순한 관점으로 평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위키리스크사 공개한 기록을 보면 사실상 미국이 전세계를 사찰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 한 것이다. 특히 각국의 미국 대사관들이 전달한 각국의 정상들을 평가한 내용을 보면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울 것이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즈는 “공개된 외교 전문은 세계 전역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관에 의한 유례없는 뒷거래와 각국 지도자들의 거칠지만 솔직한 입장, 핵과 테러범의 위협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바로 이런 지점을 위키리크스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번 공개 등으로 외교기록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일반시민들이 알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우리나라 외교부의 비밀행태를 지적하고 싶다. 외교부는 현재 매년 비밀기록을 해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비밀기록을 해제하면 일반시민들이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정보공개청구를 하면 거의 대부분 내용을 공개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외교부의 경우 비밀기록해제목록을 정보공개청구 하면 목록조차 민감할 수 있다며, 대부분의 내용을 까만 펜으로 먹칠 한 채 공개해주고 있다. 이런식이면 비밀기록 해제는 왜 하는 것이며 해제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말 국가안전보장을 위해 비공개하고 있는 것인지, 외교부 자체의 이익 때문에 비공개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그나마 일부 공개되는 목록을 보면 도저히 비밀기록으로 관리 할 수 없는 것들을 비밀기록이라고 관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비밀주의 행태가 국민들에게 불신을 야기하는 것이며 그 불신의 표현이 위키리크스와 같이 비합법적인 방식의 공개에 대한 시민들의 환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비밀기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형태적인 면에서 비밀기록으로 규정해 놓아도 그 내용이 국가안전보장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공개해도 괜찮다는 판결도 수없이 나와 있다. 위키리크스는 이 지점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방법상의 불법성이 내용적인 측면의 진실성을 가릴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전세계 시민사회는 깊이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향후 위키리크스의 행보는 이런 질문들을 전세계에 끊임없이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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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햇빛에, 공기에 주인이 있나요?

2010.12.02
한 지붕 네 가족

옥천신문 정창영 기자


지난 주말에 신문사 주최로 송건호 언론학교라는 주민교양강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총 네 개의 강좌가 준비됐는데 그 중 하나는 투명사회를위한 정보공개센터 전진한 사무국장이 맡아 주셨다. 전 사무국장은 정보공개분야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전문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참여연대 활동가를 거쳐 본인을 포함한 상근자 세명으로 이루어진 정보공개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강좌가 끝나고 뒷풀이를 겸한 식사자리가 있었다. 어찌저찌 얘기를 하다가 우리나라에서 시민활동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관한 대목에 이르렀고 전 사무국장은 어려움 중의 하나가 서울의 높은 임대료라고 지적했다. 현재 공개센터는 대학로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있는데 임대료가 240만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아무 생각없이 1년에 240만원이라고요? 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전 사무국장이 당황하며 1년이 아니라 한달에 240만원이라고요 라며 박장대소를 하는게 아닌가. 시골 촌구석에 잇다보니 서울 부동산 가격에 대한 감수성이 한참 떨어졌나보다. 그래서 문득 궁금하고 걱정이 됐다. 상근자가 겨우 세명뿐인 열악한 시민활동단체가 그 무거운 임대료를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공개센터가 있는 사무실은 하나의 공간에 네 개 단체가 함께 사용을 하고 있단다. 진보적 성향의 교회 한 곳과 공개센터, 그리고 다른 시민단체 두 곳이 하나의 사무실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한달에 240만원이나 하는 임대료를 혼자 감당할 수 없어 네 단체가 분담을 하고 있단다. 한지붕 네 가족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후원금 말고는 수입이 전무하다시피 한 공개센터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정보공개센터 사무실 모습. 하나의 방이 하나의 단체랍니다.

땅값이 무서워 시민활동을 그만 둘 수밖에 없는 현실이 G20 정상회의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오늘날이다. 전 사무국장은 말했다. 세상에 땅에 주인이 있다는게 말이나 되는냐고. 맞는 말이다. 굳이 헨리조지의 토지공개념 같이 유식한 말을 끌어다 올 필요도 없다.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된다. 햇빛에 주인이 있느냐? 공기에도 소유권이 있느냐?

당연히 없다. 없어야 한다. 그게 맞다. 누군가 있다고 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자연이 준 것에 대해 인간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비극적인 코미디다. 땅에는 주인이 있을 수가 없다. 땅은 소유자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땅은 태곳적부터 그곳에 그대로 있었는데 인간들이 소유권이니 자유재산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사고 팔았을 뿐이다. 누가 그런 권리를 줬단 말인가.

만화 스머프가 생각난다. 스머프는 한 때 음모론에 시달렸는데, 옛 소비에트 연방 시절,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어린이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만든 만화영화가 바로 스머프라는 것이다. 스머프 영문자 SMURF가 Socialist Men Under Red Father(붉은 아버지 아래의 사회주의자)의 약자이고 스머프에서 보여지는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 이론이 그리는 공동체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스머프 마을에서는 누구나 같은 집을 짓고 같은 옷과 신발을 신는다. 이곳에서는 돈이 필요없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마을을 운영하는 기본원리다. 이런 곳에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이 존재할리 없다. 물론, 이런 음모론은 재미로 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 속에서 읽히는 반자본주의적 저항정신은 분명 의미가 있다.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비교다.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산다면 부러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를 개인의 노력과 연관지으며 공정한 경쟁이라는 허울을 내세우지만, 우리는 안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스머프 마을이 부러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차별과 비교가 없는 공동체, 그곳에서 스머프들은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그렇게 살아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

도대체, 신이 만들어놓은 자연에 대해 개인의 소유권을 말하며 양극화를 낳는 이 사회는 분명 만화보다 못한 현실이다. 

전 사무국장은 센터를 운영하는 것이 많이 힘들지만 한사코 정부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자신, 한 때 70만원 밖에 되지않는 박봉을 받으며 큰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해봤다. 하지만, 외부의 지원을 받는 순간, 단체는 허물어졌다. 그런 일은 시민활동 영역에서는 비일비재 하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정부 지원은 절대 받아서는 안되는 독약이다. 다시 매달릴 곳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적인 힘이다. 후원이다. 이 사회가 삐뚤어졌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가야 한다면 시민단체를 후원하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후원은 이곳을 누르면 된다. 어려운 와중에도 공개센터는 2009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선정하는 디지털유산어워드에 선정됐다. 결코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세계적 공증이다. 
덧1)
전진한 사무국장님이 얼마전 옥천신문에 강의를 다녀오셨습니다.
옥천신문은 충북 옥천군의 지역언론으로 올해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한, 언론으로서의 제 역할을 열심히 하는 곳인데요.
신문사의 정창영 기자님께서 전진한 국장님과의 만남 후 느낀 소회를 개인 블로그에 올려주셨더라구요. 시민운동진영에 대한 응원의 내용이 있어 냉큼 퍼 왔습니다.
늘 이렇게 우리의 활동을 지지해주시는 깨어있는 시민분들이 계셔서 참 많이 고맙습니다!
덧2)
옥천신문 의 제 9회 송건호언론상 수상 이유입니다.

1989년 9월 창간된 주간 옥천신문은 보도과 경영면에서 지역 언론의 모범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화와 지역 언론의 미흡한 대응으로 인해 현재 우리나라의 지역신문은 신뢰도와 경영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신문은 특정세력의 이익을 위해 파행적으로 운영되기도 합니다.

옥천신문은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소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민주 신문을 목표로 출범하여 지금까지 편집권의 독립 보장, 편집국장 선출제 등을 통해 언론자유를 확립했고, 지면평가위원회를 운영하여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이려 노력했습니다. 

촌지와 향응으로 불리는 관행을 거부하는 건전한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지방권력과 언론이 결탁하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막아, 옥천의 자치단체•의회•권력기관•유력인사를 감시하고 견제하여 주민이 중심이 되는 지역자치가 뿌리내리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지면에서도 지역현안과 소식 그리고 주민의견을 성실하게 반영하고, 실질적인 생활정보를 제공하여 튼튼한 독자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경영면에서도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가독자율 제고, 지역 생활광고 유치, 비용절감 등을 통해 적자 없이 운영하여 언론인의 양심과 자율에 따라 보도할 수 있는 자립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옥천신문은 언론개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장왜곡이 초래한 언론독과점의 문제점을 알렸고, 2003년부터 ‘옥천언론문화제’를 주관하는 기관으로 참여해서, 언론과 언론산업을 객관적이며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교육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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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목회는 억울하다

2010.11.24
투명사회를위한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정치권과 권력기관에 현금다발을 뿌렸다는 의혹이 제기된 삼성 로비사건에서 검찰은 어떻게 수사를 했나”


‘청목회’는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의 줄임말이다. 이 이름도 생소한 단체의 로비사건 때문에 정치권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다. 검찰은 전격적인 압수수색, 체포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청목회는 로비, 검은 돈, 불법 정치자금과 같은 단어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할까?

청원경찰들이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돈을 모아 조직적으로 정치권에 돈을 뿌렸다면, 돈으로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 한 것이다. 비록 열악한 처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돈으로 정치를 움직이려한 것은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실정법에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청목회 사람들이 참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잘못을 하고도 억울한 이유는 형평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법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현금으로 후원금을 전달한 것이 문제라고 하는데, 정치권과 권력기관에 현금다발을 뿌렸다는 의혹이 제기된 삼성 로비사건에서 검찰은 어떻게 수사를 했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조직적인 금품 살포가 있었다고 폭로했지만, 검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미적거렸다. 크게 뿌리면 괜찮고 작게 뿌리면 다친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인가?

그리고 정책이나 입법과 관련된 로비는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다. 일부 대형로펌들은 전직 고위관료들을 고문으로 두고 상시적으로 로비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사립학교법 논란이 한창일 때에는 사학법인들이 조직적으로 자금을 거둬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요즘은 무슨 일만 있으면 이런저런 협회니 이익단체들이 조직적으로 돈을 거둬 로비를 시도했다는 이야기들이 들린다.

아마도 청목회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로비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니 청목회는 ‘다들 하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청목회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국회의원들도 그럴 것이다. 더 검은 돈을 받고도 무사한 정치인들이 많은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는 생각들을 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탄압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청원경찰이 아니라 청와대를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다. 로비 못지않게 나쁜 불법사찰을 하는 데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발을 빼기 바쁘다. 청와대 직원이 불법 대포폰을 사용하고 무차별적 사찰을 했다는데, 검찰은 왜 청와대 관련자들을 전격압수수색하지 못하나? 그래서 청목회를 수사하는 검찰은 전혀 멋있지 않다. 삼성 로비사건, 사학법인들의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았던 검찰이다. 청와대 앞에서는 약해지는 검찰이다. 그런 검찰이 ‘청와대 직원 친목회’도 아닌 ‘청원경찰 친목회’만 때려잡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 정권의 비민주적 통치에 기여하려 한다면, 그럼 검찰은 ‘권력의 시녀’로 비칠 뿐이다, 
이러니 ‘내가 잘못했다’가 아니라 ‘왜 나만 당하느냐’는 항변이 넘치고, 처벌받으면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외치는 ‘억울한 대한민국’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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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모르는 국무총리실

2010.11.23


국무총리실의 “눈가리고 아웅”의 도가 지나치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하 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및 하드디스크 무단 폐기와 관련해서 거짓말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민망하기까지 한 총리실의 후안무치

얼마 전 투명사회를위한 정보공개센터 전진한 사무국장은위클리 경향에 <총리실 하드디스크 폐기 “총 형량 22년 중범죄”>라는 글을 기고했다. 대포폰까지 동원한 이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그 기록이 담겨있는 하드디스크의 무단폐기를 보며 이를 조장하고 묵인하는 정부의 행위는 곧 역사를 숨기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리고 11월 22일. 법원은 민간인 사찰과 증거인멸을 지시한 총리실의 주요 관련자에게 유죄를 확정했다. 검찰 수사 직전 이레이저 프로그램으로 컴퓨터 9대의 하드디스크 파일을 삭제해 증거를 인멸하고, 삭제한 하드디스크를 영구적으로 복구 불가능하도록 디가우싱해 공용물건을 손상했다는 혐의다. 이렇게 명백한 정황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총리실은 재판부의 판결이 나기 직전까지 혐의에 대해 극부 부인했다. 심지어는 하드디스크 자료를 삭제한 일이 없다며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 한겨레


총리실이 보도된 기고글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무총리실은 디가우저 장비를 사용하여 민간인 사찰과 관련있는 하드디스크 자료를 삭제한 일이 없음
○ 공직복무관실 PC는 08년 7월 이후 생산된 제품을 사용하고 있어 노후PC 대상이 아니며, 디가우저 사용 대상도 아님
○ 디가우저 장비는 사용연수가 경과한 노후PC를 대상으로 불용처리시(양여, 폐기)시 사용하고 있으며
○ 노후PC 교체시에도 신규PC에 자료를 백업하는 절차를 수행하고 있어 수십만건의 기록(3000GB)를 삭제하였다는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다름
○ 우제창 의원이 제기한 ‘수십만건의 자료삭제’ 관련 내용에 대해 이미 보도해명자료를 배포하였음 ( 국무총리실은 디가우저 장비를 사용하여 민간인 사찰과 관련있는 하드디스크 자료를 삭제한 일이 없으며 지원관실에서 자료삭제에 사용한 이레이저는 일판 포털사에서 무료 다운받을 수 있는 쉐어 프로그램으로 총리실 이레이저인 컴퓨터 하드를 재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기존 자료를 삭제하는 장비와는 전혀 다르다는 내용임.)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언론의 보도를 막으려 하고, 그것마저도 금세 들통 난 국무총리실의 이러한 행태를 보고 있노라니 이 정부가 양심불감증에라도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기기, 뭉개기, 거짓말이 MB정부의 소통인가

이 정부가 보여준 후안무치는 이번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쌍용자동차 노조원 농성 당시 경찰은 정보공개센터에게 노조원에게 살포한 최루액 현황이 없다고 거짓으로 공개했다가 들통 나 곤혹을 치른바 있다. 
 어디 이뿐인가.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이 저지른 비리를 온갖 거짓으로 부인하다 결국에는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고 사과하거나 낙마한 장관과 총리 또한 부지기수다.  4대강 공사에서도 예산과 환경파괴, 산업 등 여러부문에서 문제점이 발생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쉬쉬한 채 강행하려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요즘 “소통”과 “공정”이라는 말이 화두다. 대통령도 여러 연설에서 소통과 공정한 사회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불통을 넘어서 단절의 사회이며 공정은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정부가 국민에게 보여준 불통의 모습은 우기기와 뭉개기, 거짓말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MTO뉴스


하지만 위의 세 가지 불통 요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 정부의 막무가내식의 숨기려는 습성과 없애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증거로 남기지 않기 위해 대포폰을 사용하는가 하면, 민간인을 무단사찰한 증거를 없애버리기도 한다. 대통령은 기록으로 남지 않아 전대에서는 지양했던 대면보고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이야기 한다. 

이렇게 밀실행정, 비밀정치가 난무하다보면 부패와 비리가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소통에 신뢰는 기대할 수 없어진다. 
그 중심에 거짓말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한 총리실이 있다는 것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럽다.

어느 드라마에서인가 본 대사로 총리실에게 한마디 전하고자 한다.

“어이~ 총리실! 거짓말 계속 하면 습관 된다.”


투명사회를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진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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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주의에서 시민권으로?

2010.11.18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이건희씨와 나는 평등한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야 당연히 불평등하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는?
이건희씨도 1표이고 나도 1표니까 평등하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이야기이다. 단지 1표를 가진 유권자인 시민이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의사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1표를 가진 이건희씨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돈이든 인맥이든)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표권은 1표씩이지만, 정치적으로 평등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


이런 얘기에 대해서 91세의 노 정치학자가 쓴 책이 있다. 미국의 로버트 달(Robert A. Dahl)이 쓴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On Political Equality)』라는 책이다.
로버트 달은 미국 정치학계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예일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책과 논문들을 썼고 미국 정치학회장을 지냈으며, 다원주의 이론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라면 연구를 열심히 한 어느 학자의 이야기 정도로 생각이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yes24>


그런데 달의 놀라운 점은 미국의 정치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그 현실에 비추어 자신의 이론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성찰해 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달은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로 변했다. 돈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미국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가로 돌아선 것이다.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는 달이 미국정치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왔던 것들을 차곡차곡 담아낸 책이다. 이 책에서 달은 미국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걱정을 곳곳에서 표현한다. 인간과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누가 91살이 되어서까지 이렇게 진지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달에 따르면 미국의 정치적 불평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정치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불평등을 가져온다. 테러리즘의 위협에 대한 과장도 미국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달은 부시정권 하에서 시민적 자유가 약화된 것을 예로 들면서 ‘어쩌면 미국은 더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닐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하나는 나쁜 시나리오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시나리오이다.

나쁜 시나리오는 미국에서 정치적 불평등이 더욱 확대되고 민주주의 제도들이 심각하게 손상되며 민주주의라는 이상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좋은 시나리오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더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 행복이나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경쟁적 소비주의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미국 시민들 사이에서 더 많은 정치적 평등을 향한 움직임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소비주의에서 시민권 문화’로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1915년에 태어나 격동의 역사를 겪어 온 정치학자인 그가 마지막까지 미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면서 내린 결론이 시민권? 이라는 건 의외이다. 그렇지만 이해가 된다. 결국 정치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지금의 흐름을 반전시킬 수 있는 힘은 건강한 시민들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소비주의에 휩쓸리고 눈앞의 이익과 돈에 집착하는 시민이 아니라 공공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건강한 시민들 말이다. 그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미래를 지켜낼 희망이라는 것이 달의 결론이다. 70년간 고민하고 연구한 결론 치고는 아주 간명하다. 그리고 이건 미국만의 얘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얘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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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하드디스크 폐기, 총 형량만 22년의 중범죄 행위

2010.11.16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전진한 사무국장 


얼마 전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흥행하고 있는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를 챙겨 보았다. 바쁜 일상에 좀처럼 영화를 잘 보지 못했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꼬집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보기로 결심했다. 

영화는 두 시간 동안 흥미진진했으나 속은 보는 내내 불편했다. 영화는 검사, 경찰, 기자, 연쇄 살인범, 조직폭력배, 기업 스폰서가 물고 물리는 관계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왜곡 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기업 스폰서를 받았던 검사가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검사출신 장인이 그에게 ‘남자가 그럴 수 있지 이럴 때 준비해서 터트릴만한 연예인 스캔들이 있어.“ 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 대사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바로 최근 영화와 비슷한 일들이 ’검사와 스폰서‘ ’대포 폰 및 하드디스크 무단폐기 사건‘ 등의 이름으로 연일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출처 : 경향신문


최근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이 공기업 임원의 명의를 도용해 5대의 대포 폰을 만들어 민간인을 불법사찰 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과 비밀통화를 위해 직원들에게 제공했다고 대정부 질문을 통해 폭로했다. 게다가 민주당 우제창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무총리실이 2006년 구매한 디가우저(하드디스크 영구 파괴 장비)를 쓰지 않다가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이 집중된 2009년부터 사용해 수십만 건의 문서를 삭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불법 사찰 증거를 인멸할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어 총리실 디가우저의 존재와 그 사용내역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재밌게도 검찰은 이런 폭로가 이어질수록 관련 내용에 대한 수사는 미적 거리고 있고 의원실의 청목회 불법 로비 수사만 가속화 하고 있다. 영화 속 검사 장인의 대사가 연상되는 되는 것은 필자만의 착각 일까? 

하지만 검찰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두 의원의 폭로는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라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매우 큰 사건들이다. 우선 사건을 하나씩 살펴보자. 대포폰 이라는 것은 조직폭력배, 사기꾼 및 불법 행위자들이 본인들의 통화내용이나 위치가 감청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하여 쓰는 전화기를 말한다. 

이런 대포폰을 청와대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불법이지만, 대포폰을 이용해 무엇인가 불법적인 행위를 했다는 유추가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커 보인다. 검찰이 청와대 어떤 지휘라인에서 지시를 내려 무슨 목적으로 사용했는지 밝히지 않고 이 사건을 덮어 버린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재 검찰의 태도를 보았을 때 이번 사건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는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국무총리실에서 민간인 사찰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은 수십만건의 기록을 디가우저(하드디스크 파기 장비)를 이용해 삭제했다는 점이다. 그 양도 3,000GB로 거의 천문학적인 양이다. 

그럼 국무총리실에서 디가우저를 이용해 하드디스크를 폐기한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법적으로 어떤 처벌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우선 적용할 수 있는 강력한 법안으로는 전자정부법 제 35조이다. 이 법안은 ‘행정정보의 처리업무를 방해할 목적으로 행정정보를 위조·변경·훼손하거나 말소하는 행위를 할 경우 최대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번 사건과 딱 맞아 떨어지는 조항이 아닐 수 없다. 하드디스크 폐기가 검찰이나 감사원의 수사 및 감사를 위한 행정정보의 처리업무를 방해할 목적이 너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기록물관리법))은 적용은 어떨까? 우선 기록관리정책을 주관하고 있는 국가기록원에서는 각 부처에 전자기록에 대해서 기록관리시스템(RMS)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 부처에 전자기록을 폐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리고 있다. 그 이유로 각 부처의 모든 전자기록은 기록폐기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게다가 기록물평가심의회 없이 기록물을 무단 파기했다면 명백히 불법 행위가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안을 위해 기록물관리법 제 50조에는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한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승휘 명지대 기록과학정보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무총리실 하드디스크 폐기야 말로 전형적인 기록물관리법 위반 사례로 검찰이 이 법을 반드시 적용해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형법 155조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 은닉, 위조 또는 변조하거나 위조 또는 변조한 증거를 사용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살펴 본 것처럼 하드디스크 폐기에 대해 대충 적용할 수 있는 처벌 규정만 도합 22년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행위들이 다른 기관들에게 옮겨 붙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 교과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상지대 사태와 관련 되어 논의한 회의록에 대해 시민단체들의 정보공개청구가 있자 보존기간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기록물평가심의회도 없이 무단파기해 버렸다. 

이 사안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사학분쟁조정위원회 관계자들을 기록물관리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사건을 종로경찰서로 이관해 버렸다. 한마디로 수사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을 뜻한다. 

향후 위 같은 사례들을 처벌하지 않고 대충 무마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예상해보자. 수많은 공직자들은 기변을 듣게 될록 자체를 정식 공문으로 등록하지 않고, 자신의 하드디스크나 집에서 보관할 것이다. 이는 기록의 생산 여부를 외부에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록을 등록하더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들은 수시로 없애버리거나, 자신의 집으로 들고 갈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 될수록 기록을 남기는 것은 귀찮은 것으로 간주되고, 의원실이 자료 제출요구를 하거나 시민들이 정보공개청구를 하더라도 ‘기록 없음’이라는 답 것이고 국민의 알권리는 무너질 것이다. 그 결과 온갖 부패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후세대에서는 이 시대에 무슨 일을 했는지. 무슨 고민을 했는지 후대에서 알지 못하고 되고 역사적 공백 상태로 기록될 것이다. 위 사례들이 음모론처럼 들리겠지만 기록물관리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수시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지금 우리는 공직자들의 행위의 결과로 남겨놓은 기록들을 파기하거나 하드디스크 파괴 장비로 뒤 엎어 버리는 일들이 대한민국 한 중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검찰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도 지시를 한 윗선을 밝히기는커녕 대충 사건을 뭉개고 있다. 매우 엄중하고 심각한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본인의 재임 시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엄중하게 사과해야 할 일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폭발하고 있는 민심을 달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레이건의 이란 콘드라 사건들이 생각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은 이번 사건을 무섭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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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식

“나는 KBS의 영향력이 두렵다” MB 망치는 KBS – ‘특보체제’의 역설

2010.11.12

* 정보공개센터 이사님으로 계신 KBS 김용진 기자님께서 <미디어오늘>에 긴급투고하신 글입니다.


<KBS 뉴스9>은 그저께(11월 9일) 리포트 2꼭지를 털어 KBS의 매체 신뢰도와 영향력이 모두 1위로 나타났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언론진흥재단의 조사를 인용해 신뢰도는 44.2%, 영향력은 무려 52,4%로 집계됐다고 한다. 단순 수치로 보자면 KBS의 영향력은 우리나라 모든 신문, 방송, 인터넷 매체의 영향력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셈이다. 

KBS 기자로서 나는 이 수치가 자랑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사실 나는 KBS의 이 영향력이 몹시 두렵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향력의 용처가 두렵다. 그 자화자찬 리포트가 나간 바로 그날 밤 KBS 1TV의 황금시간대에 이 영향력이 어떻게 쓰였는지 한번 살펴보자. 먼저 메인뉴스인 <뉴스9>엔 어김없이 G20 홍보리포트가 몇 개씩 들어있다. G20 준비상황을 다룬 리포트의 앵커멘트는 “G20 정상회의. 예행연습도 어찌나 빈틈없는지 각국 지도자들의 배우자까지 대역을 썼습니다”로 시작한다. 어찌나 빈틈없는지?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앵커멘트가 아닐 수 없다.

   

  ▲ 매주 주말 밤 KBS 메인뉴스 방송 직후 내보내고 있는 < G20 국가탐구 >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하다. 9시 뉴스가 끝나자마자 밤 10시부터 <G20 특별기획-코리아 기적을 나누다>, <G20 기획-세계는 지금>을 줄줄이 방송하고 <뉴스라인>에서 다시 G20을 취급하더니 밤 11시 반부터 바로 <G20 특별기획-세계정상에게 듣는다>, <G20 특선다큐-음식으로 통하라>로 쉼 없이 달린다. G20 관련 특집이나 뉴스엔 ‘국모님’ 때문인지 유달리 한식 세계화 관련 아이템이 많다. 어쨌든 시청자들의 미각까지 달랜 뒤 10분짜리 뉴스에 이어 잠 못 이루는 시청자들을 위해 <G20 기획-책 읽는 밤>을 새벽까지 방송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어찌나 빈틈없이’ G20 특별기획을 편성했던지, ‘G20 특집’ 아닌 것들은 끼어들 틈이 없다.


‘G20 신화’에 특집 3천 3백 분 투입
 
그리고 어제 밤 <KBS 뉴스9>은 이전에 단신으로 처리했던 ‘G20 경제유발효과 수십조’ 등 나온 지 한참 된 삼성경제연구소 등의 ‘아니면 그뿐’인 수치를 다시 끄집어내 리포트로 처리하고, ‘세계 경제 중심축으로 우뚝’ 등의 리포트로 G20에 대한 환상을 극대화시키는 등 무려 15건의 G20 관련 리포트를 쏟아냈다. KBS 1TV 시청자들은 메인뉴스가 끝난 뒤 어제도 변함없이 계속되는 G20 특집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 정상에게 듣고, 한식의 우수성을 또다시 주입받아야 했다.

G20이 열리는 오늘과 내일은 편성표가 온통 G20 특집과 생방송으로 도배돼 있다. 서울 개최가 확정된 직후부터 올해 신년특집, D-100, D-90식으로 카운트다운 되면서 진행돼 온 거대한 선전 캠페인이 이제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언론노조 KBS 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KBS가 편성한 G20 특집 프로그램이 TV에서만 3,300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시도 때도 없이’ 나가는 홍보 스팟이나 뉴스는 뺀 시간이 그렇단다. 세계 방송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이다.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영채널을 통해 단일 행사를 놓고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프로파간다가 자행된 곳은 아마 대한민국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KBS가 무려 3,300 분을 퍼부어 시청자들에게 융단 폭격해대는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G20 서울 개최로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라는 신화다. 이 신화를 형성하고, 지탱하는 스토리는 매우 방대하지만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세계 주요 20개국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가 초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재자와 조정자 역할을 하는, 더 나아가 세계의 새로운 경제 질서를 좌우하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나타난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영속적 캠페인(Permanent Campaign)’의 해악

이 영웅 신화는 ‘단군 이래 최대의 행사’, ‘국가 브랜드와 국격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행사’ 등 화려한 수사(rhetoric)로 치장된다. 하지만 이 신화 만들기는 지난 80년대에 미국의 언론인 시드니 블루멘탈(Sydney Blumenthal)이 일찍이 갈파한 ‘영속적 캠페인(Permanent Campaign)’의 전형적인 사례다. 블루멘탈은 ‘영속적 캠페인’이 전략적 계산과 이미지 메이킹이 결합된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하고, 정치 지도자가 당선된 이후에도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고, 대중의 동의를 지속적으로 조작해 내기 위한 정치 공학이라고 말했다(Ben Fritz, All the President’s Spin, 2004). 정치평론가인 조 클라인(Joe Klein)은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백악관에 의해 보편화된 ‘영속적 캠페인’은 조지 부시 정권에 이르러 최고 경지에, 완전히 막장 수준에 올라 그 추잡한 완결판을 보여줬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The Perils of Permanent Campaign, TIME, 2005.10.30). 부시의 영속적 캠페인에 대한 클라인의 비판적 관점은 실제 부시 백악관에서 두 번째 대변인을 역임한 스콧 맥클렐런(Scott McClellen)의 회고록 ‘거짓말 정부(원제는 What Happened)에서 보다 더 명료해진다.

오늘날 워싱턴 정가는 진실을 가리기 위한 교묘한 속임수와 일부만 공개되는 진실, 진실의 왜곡과 정보 조작에 기초한 끊임없는 정치공작, 즉 영구적 캠페인(permanent campaign)의 본거지가 되었다. 성공의 유일한 수단인 듯 보이는 선거의 승리와 권력 장악에 밀려, 국가 통치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다.(거짓말 정부, p.11)

흥미롭게도 맥클렐런의 증언에서 ‘워싱턴 정가’라는 단어를 ‘한국’으로 바꿔 읽어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건 왜일까? 최근 각 언론사에서 잇따라 보도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지지도는 대부분 50%를 상회하고 있다. 청와대도 자체 조사한 지지도를 발표하며 자화자찬에 나서고 있다. 집권 후반기에 50% 넘은 지지율은 이례적인 수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 언론매체를 모두 합친 것보다 영향력이 큰 KBS가 G20을 앞두고 3,300분을 할애해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데, G20 정상회의의 의장석에 앉을 인물이 이 정도의 지지도 받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을 진행하고 있다. KBS에서 라디오로 중계하고 있다. ⓒ사진출처-청와대  


지지율은 단순히 정치지도자의 인기도를 나타내는 척도에 머물지 않는다. 현대 정치에서 지지율은 그 자체가 강력한 권력행사 도구다.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고, 반대 의견은 묵살할 수 있는 포괄적 근거가 된다. 그것이 정치지도자들이 지지율에 목매는 이유다. 부시 전 대통령은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조작해 내며, 이라크의 위협을 과장하는 기만술책을 통해 이라크에 쳐들어갔다. 그 때 부시의 지지율은 무려 80%대에 도달했다. 그 경이로운 지지율이 초래한 파국은 모두가 잘 아는 대로다. 그리고 그 파국을 조장한 또 다른 주연은 바로 미국의 주류 매체다. 맥클렐런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2002년 가을, 부시와 백악관은 (이라크 침공을 위한) 대중적 지지의 기반을 유리하게 형성하고 조장하기 위해 면밀히 계획된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여 대중매체는 이에 공모하는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언론의 최대 관심사는, 전쟁의 근본적 이유를 집요하게 묻거나 그 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전쟁을 선전하는 캠페인을 취재하는 데 있었다. (거짓말 정부, p.174)


MB ‘영웅설화’에 올인한 공영방송 KBS 

지금 우리 사회는 MB 정권과 KBS 등 주류 언론이 만들어 낸 G20 캠페인에 융단폭격 당해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 UAE 파병문제, 4대강 문제 등 중차대한 현안들을 망각해가고 있다. 한국의 대다수 언론인들은 사실 G20이 반년마다 열리는 회의체에 불과하고, 설사 서울에서 어떤 합의가 도출되더라도 구속력이 없는 상징적 수준에 머물 것이며, 이 회의로 우리가 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는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 내일 정상회의가 폐막하면 G20은 금방 잊혀질 1회성 행사라는 것도 주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들을 환상에 몰아넣은 기만의 대가를 어떻게 치를 거냐고? 장담컨대 그럴 일은 없다. 어차피 장밋빛 레토릭은 곧 망각될 것이고, 이번 주말부터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또다시 우리 의 ‘국격’을 높이는 장치로 등장할 것이다. 청와대는 대한민국을 빛낸 메달리스트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사진을 찍으며, 또 하나의 캠페인을 벌일 것이고, 그 이후, 또 그 이후의 이후에 전개할 캠페인도 정권 내부에 포진한 전문가(propagandist)들이 지금 머리를 짜내 기획하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MB 정권의 ‘영속적 캠페인’이 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알 순 없지만 시선을 과거로 조금만 돌리면 그 행태가 어떤 것이 될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27일 휴일 오후 KBS 1TV는 정규방송을 끊고 UAE 원전 수주 소식을 특보로 전했다. ‘원전르네상스’ 신화의 시작이었다. 뉴스가 원전으로 도배되고, 특집이 잇따랐다. MB의 막판 담판 소식이 영웅담으로 부각됐다. KBS를 필두로 한 주류매체의 대대적인 신화창조 캠페인에서 주인공은 단연코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원전 신화가 확산되는 와중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MB 지지율은 1년 8개월 만에 50%대를 넘었다.

올 봄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은 그 원인 공방과는 별개로, 6. 2 지방선거 일정에 맞춰 세심하게 고안된 것으로 보이는 의사사건(pseudo-event)이 ‘영속적 캠페인’의 정수를 보여줬다. 이와 더불어 군부의 거짓과 무능, 청와대의 미숙한 초기 대응 등 정권에 치명적 부담이 될 약한 고리들을 한순간에 덮어버리고 성금모금 방송 등을 통해서 국면을 ‘천안함 영웅 신화’ 스토리로 일거에 전환시킨 KBS의 기교는 예술적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이런 거대 프로젝트와 더불어 추석 연휴 때 <아침마당>을 통해 작지만 임팩트 있게 ‘MB의 눈물겨운 사모곡’을 연출해내는 기법 또한 전두환 시절의 KBS를 훨씬 능가하는 솜씨였다. 어려운 유년 시절을 극복하고 왕이 되어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어준 친모를 회상하는 것은 ‘영웅설화’의 대표적 서사 구조다. <아침마당> 방송 후 청와대는 MB 지지율이 50%를 넘었다고 발표했다.


캐나다 공영방송 CBC를 배워라!

그리고 우리는 이제 KBS가 중심이 돼 만들어 내는 역대 최강의 신화 ‘G20’의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혹자는 단군 이래 최대 행사에 주관방송사인 KBS가 국익을 위해 좀 신경을 쓰는 것 가지고 뭐 그리 트집을 잡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캐나다 공영방송 CBC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지난 6월 개최된 토론토 G20 정상회의 때 CBC가 무엇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또 CBC가 G20 개최에 맞춰 개설한 뉴스 블로그 <G20: STREET LEVEL>도 한번 둘러보기 바란다. 공영방송이 대형 이슈를 두고 ‘공론장’으로서 어떻게 기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의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 장담컨대 KBS의 G20 특집 3,300분은 두고두고 공영방송 KBS의 부담이 될 것이고, MB에겐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기를 바라는 유권자 가운데 한 명이다. 하지만 현재 추세라면 이런 기대는 이뤄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조 클라인과 스콧 맥클렐런도 지적했듯이 극단적 형태의 ‘영속적 캠페인’은 국민 여론을 오도할 뿐 아니라, 지도자 자신마저 파멸의 길로 이끈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소통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요즘 행보를 보면 단순히 소통 능력의 부재를 넘어 일종의 선지자적 자기 확신과 자기기만이 기괴하게 결합된 모습이 감지된다. KBS 9시 뉴스에 시시콜콜 보도됐듯이 G20 준비 상황을 일일이 감독하러 다니는 모습은 조선중앙TV의 이른바 ‘현장지도’ 모습을 연상케 한다. 외국 정상과 포즈를 취할 때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도 아슬아슬하다. ‘법과 원칙’, ‘공정사회’ 등을 내세울 때는 자신의 과거와의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법과 원칙‘이나 ’공정사회‘ 등과는 거리가 있었던 자신의 과거 삶에 대한 기억을 메모리에서 지워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청와대의 대포폰 문제가 불거져도, 자신이 직접 담판해 수주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UAE 원전 수주 과정에서 1년여 만에 ‘파병 패키지’라는 이면합의 의혹이 제기돼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런 문제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G20 신화의 주연으로서, 세계적 지도자의 역할 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인지부조화의 해소책-자기기만 혹은 자기 정당화

‘인지부조화론’의 대가인 사회심리학자 앨리엇 애런슨(Elliot Aronson)에 따르면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신념이나 현재 자신에게 ‘편리한’ 진실에 배치되는 증거가 나오면 기존 신념을 유지하거나 공고히 하기위해 새로운 증거를 비판, 왜곡, 기각할 방법을 찾게 된다고 한다. 애런슨은 이런 심적 왜곡 현상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라고 했다. 또 사람들의 기억은 종종 과거 사건의 윤곽을 흐리게 하고, 범죄성을 호도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자기고양 편향(ego-enhancing bias)에 의해 재단되고 형성된다고 한다. 이런 심리기제를 다른 말로  자기 정당화 혹은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애런슨은 자기 정당화는 공공연한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는 특히 자신의 행위를 국민들에게만 정당화하는 대통령은 그것을 바꾸도록 설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 진실이 있다고 믿고 자신의 행위를 자신에게 정당화하는 대통령은 교정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교정 불가의 상태까지 가버린 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애런슨은 자신의 저서 <거짓말의 진화>에서 나치 상층부가 자기교정 장치 없이 ’자기기만‘이 가득 찬 ’왜곡거울‘의 방에 갇혀있었다는 히틀러의 심복 알베르트 슈페어의 고백을 인용하며, 권력자들에게 비판의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다.

모든 사람이 나름의 맹점들을 갖고 있다면 자기교정의 가장 큰 희망은 우리 자신의 바람과 확신밖에 볼 수 없는 거울들의 방에 갇혀있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믿을 만한 반대자가 필요하다. 기꺼이 자기정당화라는 보호용 풍선을 터뜨려주고 우리가 현실에서 너무 멀리 벗어날 때는 다시 제자리로 이끌어주는 비판자들 말이다. 이는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하다.(거짓말의 진화, p. 100)


KBS, 권력자의 ‘믿을만한 비판자’가 돼야

나는 공영방송 KBS가 애런슨이 말하는 그 ‘비판자’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비판자’의 역할이야말로 공공에 봉사하는 공영방송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사명이다. 지금 KBS의 김인규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특보 출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사장은 KBS를 MB의 ‘믿을 만한 반대자’로 기능하게 해서 MB가 제자리에서 벗어날 때 다시 제자리로 이끌어줘야 한다. 그것이 과거 주군을 진정으로 돕는 길이다.

하지만 지금 KBS는 MB를 신화로 가득 찬 ‘거울의 방’에 몰아넣어 신화의 주인공처럼 보이도록 착시현상을 유발하고, 자기 확신과 정당화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자에게 자기 교정의 기회를 제공해야겠다는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MB 정권을 돕는 게 오히려 망치는 길이다. 특보 출신이 KBS 사장으로 와서 특보 출신다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특보 체제 KBS의 역설이다.

▲ 김용진 울산 KBS 기자(전 KBS 탐사보도팀장)

김 사장을 필두로 한 KBS의 수뇌부는 불과 1년여 만에 KBS를 이명박 정권의 프로파간다 도구로 전락시켰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공영방송의 가치, 공정성 등을 내세운다. G20 같은 정례 행사에 수천 분을 편성해 정권 홍보를 자행하면서도 공영방송 운운 하는 것은 인지부조화의 전형이다. 이들은 이런 부조화의 간극을 ‘국익’ 또는 ‘주관방송’ 등으로 해소한다. 하지만 이런 자기기만은 또 한 명의 불행한 대통령을 만들고, 우리 소중한 공영방송 시스템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비극의 씨앗이다.


더 늦기 전에 이 대통령도, KBS도 자기 교정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들도 불행해진다. 50%를 웃도는 KBS의 매체 영향력과 신뢰도는 그 자체를 가지고 자랑할 일은 아니다. 그 영향력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느냐가 진짜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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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식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 현실에 발 딛은 정의

2010.11.11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미국 하버드 대학교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발간 6개월 만에 59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이 이례적인 현상의 원인을 놓고 우리 사회의 정의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이 책의 열풍이 우리 사회 정의의 실현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일 게다. 마침, 지난해 대학 교수 직을 그만두고 시민운동가로 나선 하승수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소장이 <정의란 무엇인가> 현상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글을 <녹색평론> 최신호(11~12월호)에 발표했다.
정의란 딜레마 상황에서의 선택에 관한 ‘지적 유희’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다 정의롭게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실천의 문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녹색평론> 측의 허락을 얻어 하승수 소장의 ‘현실에 발 딛은 정의’ 전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갑자기 한국 사회에서 ‘정의’, ‘공정’ 같은 단어들이 화두가 되고 있다. 하버드대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올해 출판계를 휩쓸었다. 책 안 읽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인문·사회과학 책은 특이한 사람들만 읽는 책이 된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3개월 만에 32만 권이 팔리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8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국정 지표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과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한 사회’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전혀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정의’나 ‘공정’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니
나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열풍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그래서 몇 달 동안은 외면했다. 그런데 두 달 전쯤에는 한 주간지에서 ‘정의’에 관한 기사를 특집으로 쓴다면서 연락이 왔다. 담당 기자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봤냐고 물었다. 솔직히 안 읽어봤다고 했다. 왠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이 책을 외면했다는 심정도 얘기했다. 책은 안 읽어봤지만, ‘정의’에 대해 할 말은 많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상식적이고 소박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결과의 평등은 고사하고 기회의 평등조차도 거론하기 어려워지는 한국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이라도 보장된다면 좀더 정의로워지는 것 아니겠냐는 얘기를 했다. 빈곤 아동·청소년이 100만 명에 달하는데, 4대강 파헤치는 데 돈을 쓰고 있는 이런 부정의가 사라지는 게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했다.
전화를 끊고보니, 그래도 한번 읽어보기나 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샀다. 책을 사서 읽어보니, 미국 학자답게 많은 사례들을 통해 정의에 관한 이론과 논쟁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는 쉬운 책도 아니고,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책도 아니다. 과연 이 책을 구입한 수십만이 넘는 사람들 중에서 몇%가 이 책을 끝까지 읽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만약 마이클 샌델이 하버드대 교수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기 강좌를 바탕으로 쓴 책이 아니었다면, 과연 한국에서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렸을까? 짐작하기에는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책 표지의 설명이, 그것을 부각시킨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이, 그리고 책을 소개하면서 ‘하버드대’를 기사로 부각시켜준 언론이 사람들의 구매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일류선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상한 과소비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사진출처 : http://blog.aladin.co.kr/716635166/3891971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많은 사례들을 들고 있다. 그중에는 실제 사례들도 있지만, 질문을 하고 논쟁을 붙이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사례들도 있다. 그런 사례들은 도덕적 딜레마에 관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여러 군데에서 등장하는 ‘철로를 이탈한 전차’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신은 철로를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있다. 그런데 저 아래 철로로 전차가 들어오고 있다. 철로 끝에는 다섯 명의 인부가 있다. 그런데 전차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전차가 인부 다섯 명을 들이받기 직전이다. 피할 수 없는 재앙 앞에 무력감을 느끼다가 문득 당신 옆에 서있는 덩치가 산만한 남자를 발견한다. 당신은 그 사람을 밀어 전차가 들어오는 철로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 그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다섯 명은 목숨을 건질 것이다(당신이 직접 철로로 몸을 던질까 생각도 했지만, 전차를 멈추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다).
이런 사례를 놓고 마이클 샌델은 덩치 큰 남자를 철로로 미는 행위가 옳은 것인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하면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원칙과, 아무리 명분이 옳다 해도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원칙 사이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현실에서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던 안락사, 장기(臟器) 거래, 징병제, 대리모, 소수집단우대정책에 관한 사례들도 이용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수강을 하는 학생들에게 사고력의 훈련, 지적인 훈련을 시키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번역자도 이 책이 ‘정의에 관한 고난도의 지적 유희’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적 유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 철학에 대한 지식을 쌓고, 사고력은 훈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에서 겪고 있는 문제가 아닌 가상의 사례나, 나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 사례들을 가지고 던진 질문들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다가갈지는 의문이다. 정의를 위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필요한 질문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이다. 마이클 샌델이 살고 있는 미국 사회, 그리고 그와 학생들이 강의를 하고 강의를 듣는 하버드 대학은 과연 정의로운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정의란 무엇인지를 찾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질문은 아닐까?
하버드대의 두 정의 이야기
하버드대에서도 정의를 ‘지적 유희’가 아닌 현실 속에서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이 있어왔다. 2001년 하버드대에서는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의 정의’를 찾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생활임금캠페인’으로 불린 이 캠페인은 50여 명의 학생들이 비폭력 직접행동의 하나인 연좌시위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정의’였다. 그들은 하버드 대학 캠퍼스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고용을 좀더 안정시킬 대책을 요구했다.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이라는 하버드 대학의 비정규 노동자들은 1,0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주로 수위, 청소부, 시설관리인 같은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 최저생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못 미치는 시간당 6.5달러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연좌시위를 시작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기숙사에서, 식당에서, 캠퍼스 곳곳에서 누리는 편리함과 안락함이 이런 비정규·저임금 노동에 기초한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학생들은 연좌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연좌시위에 대한 하버드 대학당국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학생들의 연좌농성은 3주에 걸쳐 이어졌고, 점차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빈곤과 인간의 존엄성 결여가 하버드 대학의 경제적 기반이어서는 안된다”고 호소했다. 일부 졸업생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결국 하버드대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임금을 시간당 10.25달러로 올리기로 약속한다. 물론 책에는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빈곤과 불평등에 관한 얘기는 중간 중간에 나오지만, 정작 하버드 대학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를 생각하면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질문이다. 과연 내가 있는 곳은 정의로운가? 저임금·비정규 노동에 기초하고 있는 대학은 정의로운가? 정의에 관한 대학에서의 논의는 이런 현실에서 출발할 때에,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진 토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샌델이 하버드 대학의 문제에 눈감고 지적인 유희만 즐기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버드대 생활임금캠페인을 알고 있었고, 참여도 했다. 하버드대 생활임금캠페인이 벌어질 당시에 지지서명을 한 하버드대 교수명단을 찾아보니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Professor of Government)’이라고 명단에 나와있다. 샌델도 자신이 발딛고 있는 하버드대의 현실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실 문제는 마이클 샌델의 책 자체라기보다는 그 책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이다. 그의 책은 좋은 교재일 수 있고 좋은 교양서일 수도 있다. 어려운 정치철학의 문제들, 정의에 관한 이론들을 그래도 이해하기 쉽게 잘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샌델은 ‘정의’에 관해서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한 훌륭한 학자임이 분명하다.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보고 읽으면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연구주제인 ‘정의’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분석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학문적인 열정은 높이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책이 한갓 장식품일 수도 있는 게 한국 사회이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는 정의에 관한 회의와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밥상이나 술자리의 화제로 올릴 수 있는 게 한국 사회이다. 주로 생각하는 것은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이면서도 때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자신의 교양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곳이 한국 사회이다.
‘지적 유희’가 아닌 ‘현실의 정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제목을 들었을 때에 떠오른 또다른 ‘정의’에 관한 책이 있다. 그 책은 리 호이나키가 쓴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이다. 리 호이나키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도미니크수도회에 들어가서 사목활동을 하기도 하고, 이반 일리치와 같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활동하기도 하다가, 나이 사십에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박사논문을 작성하던 중에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와 미국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부도덕에 대한 항의 표시로 가족과 함께 베네수엘라로 자발적인 망명을 한다. 그랬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받고, 일리노이주에 있는 생거먼주립대학이라는 실험적인 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곳에서 그는 7년을 근무하고 정년보장 교수가 된 직후에 대학을 그만두고 시골로 가 농부가 되었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는 리 호이나키가 자신의 이런 인생역정을 돌아보면서 쓴 책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대학 교수를 그만두게 된 이유였다. 호이나키가 근무하고 있던 대학은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대학이었다. 그래서 그가 이 대학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그는 초기에는 열정적으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대학의 분위기는 정체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에 대학에서 교수노조가 조직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때 호이나키는 다른 교수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사회 전반의 임금과 급료 구조로 볼 때 우리가 받는 봉급이 과분한 것이라는 내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그들과 한층더 멀어져버렸다. 이 나라의 대학 교수들이 이미 누리고 있는 물질적 및 정신적 혜택에 비추어 교수노조를 결정하려는 욕망은 당혹스러울 만큼 병적인 것이었다.
호이나키가 보기에는 이미 충분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학 교수들이 교수노조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주장하려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후 여러 질문들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부정(不正)한 사회의 가운데서 엘리트그룹의 일원으로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나날의 고투 속에서 기진맥진해 있는 동안에 어떻게 내가 특권적인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그가 보기에 대학은 명예스러운 일터였지만, 미국의 대중을 위하여 필요한 비판적 목소리를 낼 역량은 모자랐다. 그는 점점더 대학사회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는 정년보장 교수직을 얻은 다음에 호숫가에서 명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자기자신에게 물어본다.
창조세계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데 내가 어떻게 동참할 수 있단 말인가? 현대사회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과 희생자들을 생각할 때, 내가 어떻게 고액의 급여와 특권이 평생 보장되는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대학 교수를 그만둔다.
대학 교수로서의 안락하고 안정된 생존은 생각해보면 마음 편한 것이 아니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수많은 의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 아마도 이제는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때였다. 나는 내가 빠져있는 수많은 갈등을 가지고 더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진정한 정의는 비틀거리며 찾아가는 것
나는 리 호이나키처럼 신념이 강하지도 않고 호이나키와는 생각이 다른 점들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는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늘 정의에 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적 유희’보다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택했다. 그게 그의 글이 마이클 샌델의 글과 다른 점이다.
나는 작년 연말에 지방 국립대 교수를 사직했다. 여러가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 교수가 되었을 때에는 평생 교수를 할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시민운동에도 지치고, 나 자신과 삶에 대해서도 지쳐갈 때였다. 그때 지방 국립대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내게는 환상적인 자리로 보였다. 그래서 교수가 되었고, 교수가 된 다음에도 대학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승진과 정년보장에 필요한 논문 편수도 채워두었고, 강의준비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다.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웠다. 아마도 이제까지 가진 직장 중에서 가장 내 적성에 맞는 직장이었던 것 같다. 물론 가장 안정된 직장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회의가 찾아왔다. 회의는 이럴 때 왔다. 연구실로 들어가는 길에 청소를 하고 있는 비정규직 아주머니를 볼 때 회의가 왔다. 어느새 대학 교수라는 직업에 안주하려는 나 자신을 보면 회의가 왔다. 연구용역에 매달리고, 정치권이나 관료들이 요구하는 대로 립서비스를 해주는 교수들을 보면 회의가 왔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지 못해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 학생들을 보면, 그리고 졸업한 학생들이 진로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것을 보면 회의가 왔다. 사회는 점점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대학은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표류하고 있었다. 과연 나는 진실한 것을 말하고 진실되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서있는 자리는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물론 내가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논문과 책을 쓰면, 나는 성실한 교수이고 대학의 공식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샌델이 설명하는 그 어떤 정의에 관한 이론에서도 그런 삶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정의한 사회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자기 의무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자기가 속한 조직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들 그 부정의한 사회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손에 잡았던 것 같다. 호이나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고민과 그의 결단을 훔쳐보면서 부러워했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순간에도 그가 생각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호이나키와는 달리, 나는 농촌이 아니라 도시를 택했고, 욕망으로 가득 찬 사회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아직은 여기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맞든 틀리든, 이 부정의한 사회시스템에 제대로 한번 맞서보고 변화를 위해 노력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달 정도가 지났다. 나는 다시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물론 쉽지는 않다. 대학을 그만두고는 한번도 후회를 하지 않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쉬운 적이 여러번 있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틀거린 적이 없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정의를 향한 길을 가고 싶다.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하승수 소장

나는 ‘정의’라는 말을 좋아한다. ‘정의’는 여전히 소중한 가치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정의’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는 소박한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정의이다. 나 혼자 잘살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협동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뤄가는 사회, 사람들이 불안에 휩싸여 무한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생하고 공존하는 사회,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사회, 돈과 권력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돈과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정의이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자의 독점물도 아니고 하버드대생들의 지적 유희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곳곳에서 던지면서 연대하고 실천할 때, 정의는 우리 앞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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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식

가짜 참여, 진짜 참여

2010.10.25
투명사회를위한 정보공개센터
하승수 소장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를 표방했을 때에, 공무원들이 시민단체에 찾아와서 ‘참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가 해 준 말은 ‘기본에 충실하라’는 것이었다.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고 시민들에게 권한과 역할을 주면, 참여는 저절로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5년 동안 내가 말했던 기본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의지와 말은 관료조직을 통해 실행되어야 했지만, 모든 것은 관료조직을 거치면서 왜곡되었다. 주민참여를 보장하는 제도를 만들려고 했지만, 정작 나온 결과물은 주민들이 참여하기 힘들게 만든 법안이었다. 
따지기도 해 봤지만, 두터운 관료조직의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참여정부’는 저물어 갔고, 정권이 바뀌면서 참여라는 단어는 설 자리를 잃었다. 정부는 귀를 닫았고, 이명박 대통령은 소통을 거부했다. 

6.2 지방선거는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많은 야당 당선자들은 주민참여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가짜 참여’로 전락할 가능성도 많다. 관료조직에 둘러싸여 침몰한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을 염려도 있다. 

우선 참여를 말하면서도 참여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경우가 보인다. 경기도 김포시의 경우에는 시민들의 의견수렴을 위한 ‘시민패널’이라는 제도를 도입하면서, 그 중 50%는 읍ㆍ면ㆍ동장이 추천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읍ㆍ면ㆍ동장이 찍은 사람이 참여하는 것을 시민참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낸 의견이 전체 김포시민을 대표하는 의견이 될 수도 없다. 

한 가지 예를 든 것이지만, 야당 지방자치단체장이 당선된 지역 곳곳에서 이런 식의 ‘가짜 참여’가 난무할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의지가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료조직의 암묵적인 저항에 부딪힌 때문이기도 하다. 참여에 대한 경험도 없고 참여에 대해 비우호적인 공무원들에게 맡겨 놓아서는 참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또한 ‘참여정부’를 거쳤지만, 여전히 야당 정치인들조차 참여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다. 참여는 아무렇게나 사람들 모아서 위원회만들고 여론조사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진짜 참여’가 되려면 참여하는 주민들을 대표성있게 선정해야 한다. 배심원을 뽑듯이 무작위 추출을 하되, 연령별/성별 안배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게 어려우면 공개모집을 해서 추첨을 하는 방식을 택해서라도 자의적인 선정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이주민ㆍ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참여를 요식행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권한과 역할을 줘야 한다. 그것은 기존에 지방자치단체장과 공무원들이 행사하던 권력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일 충남 부여에서는 ‘제1차 충남도민 정상회의’가 열렸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주민참여의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에서 외국의 타운홀 미팅(town hall meeting) 방식을 참고하여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모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온 의견들을 참고하여 충남도정의 정책 우선순위를 결정하겠다는 것이 안희정 지사의 의지였다. 


그러나 문제도 많았다. 여성들과 20대의 참여가 저조했고, 참여자들에게 충분한 토론의 시간이 보장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가능성은 보였다. 참여자들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안희정 지사는 ‘이제 소수의 권력자들이 고독에 찬 결단을 내리던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해 자신의 권력을 내놓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앞으로 충남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한 주민참여의 시도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는 ‘가짜 참여’ 시늉은 그만 하고, ‘진짜 참여’의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 
* 이 글은 위클리경향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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