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도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큰딸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 목소리에선 걱정과 미안함이 배어났습니다. “아빠, 내일 학교에 수채물감, 팔레트, 붓, 물통을 가져가야 되는데 깜박했어요. 집에 올 때 사올 수 있어요?” 직장에 다니는 아내도 퇴근 뒤 갓난아기를 보느라 정신이 없던 터였습니다.
이미 밤 9시였고, 일을 마무리하려면 1시간은 더 필요했습니다. 문구점은 문을 닫았을 테고, 집 근처 대형마트가 밤 12시까지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경기도 안산시의 집까지 가는 데는 두 시간쯤 걸립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마을버스와 지하철로 갈아탔습니다. 안산에서 대형마트 앞에 내리니 자정 5분 전이었습니다. 마구 달려 딸의 준비물을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한숨 돌린 뒤에야 회사 동료가 사무실을 나서는 제게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애들은 학교 안에 ‘문구점’이 하나 있다던데. ‘학습 준비물비’를 따로 마련해두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예산 지침이 있대. 애들 1명당 2만원이라던가. 우리 애 다니는 학교는 2만5000원인가 해서, 애들이 맨몸으로 학교에 가.”
교과부의 지침이라는데, ‘지침’이다 보니 지키는 곳도 있고 지키지 않는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료는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습니다. 물감이야 소모품이니 계속 사야겠지만, 팔레트·붓·물통은 학교에서 한 번 사면 선후배들이 함께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날 저는 준비물에 2만원 넘게 썼습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 급식비가 밀린 아이들도 많다던데, 그런 집에선 학교 준비물도 큰 부담일 겁니다. 진정한 ‘무상교육’이라면 아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배우고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 앞으로 학습 준비물비가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보공개청구제도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감시로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재훈 건축설계사(세 아이의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