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을 다녀온 동료가 말했다. 도시를 벗어나 자전거를 타는데, 마을이 바뀌어도 주민반대대책위 깃발과 현수막은 계속 이어진다고. 떠올려보니 나도 시골길을 지나던 중 비슷한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XX면 주민대책회의’가 만든 현수막. 마을이 바뀌어도 내용은 비슷했다. 주민들의 동의 없이 추진되는 폐기물소각장이나 매립장을 반대하는 내용이다. 전국에 이런 현수막이 얼마나 많이 붙어있을까 아득했다.
도시에서 만들어지는 폐기물 대부분은 도시 밖에서 처리된다. 인구가 적은 농촌이 대부분이다. 전국 산업폐기물의 약 60%가 대표적 인구소멸지역인 경상북도에서 처리된다는 수치가 이를 반증한다.
기업들은 국내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의 90%에 달하는 산업폐기물을 처리하고 수익을 얻기 위해 전국의 농어촌 곳곳에 매립장, 소각장, 유해재활용시설들을 짓고 있다. 문제는 이득은 기업이 취하는 반면 사업추진으로 인한 피해는 지역주민이 오롯이 떠안아야 한다는 점이다. 폐기물 처리시설이 생긴 후 마을에 암환자가 우후죽순 생겨났다거나 주변지역 주민들에게 패혈증이나 피부병 등 이전에는 없던 병이 생겼다는 피해사례는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난개발과 환경파괴로 인해 ‘발암’마을이라는 슬픈 별명이 생길 정도다.
주민은 알 수 없는 결정과정
문제는 이런 피해들을 막거나 멈추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주민대책위가 만들어지고 대응을 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동의 없이 이미 행정부처에서 인허가가 완료된 뒤인 경우가 많다보니 이를 막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산업폐기물은 생활폐기물에 비해 주민들의 감시도 쉽지 않다. 「폐기물처리시설의 설치 촉진 및 주변지역 지원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생활폐기물처리시설은 주민감시가 보장되어 있지만,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산업폐기물시설에 대한 주민감시 시스템은 마련되어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위법행위들이 발생하기 쉽고, 문제를 주민들이 확인하기도 어렵다.
제도 밖에서라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서는 관련정보들을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이 역시 녹록치 않다. 중요한 자료인 환경영향평가서의 공개는 한참이나 늦어지고, 사업을 승인하는 회의들은 주민들에게 비공개되기 일쑤다.
산업폐기물처리시설로 인한 농촌주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지난 7월 7일 전국 각지의 주민대책위원회와 시민단체들이 국정기획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충남 천안시, 울산 울주군, 경북 고령군, 김천시, 경주시, 봉화군, 영주시, 밀양시, 경기 연천군, 전남 목포시와 보성군 등 전국에서 지역주민 50여명은 주민들의 안전한 삶과 공공성을 배제한 산업폐기물 처리에 대한 법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산업폐기물 처리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모았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최현정 SRF소각시설반대범시민연대 집행위원장은 ‘주민동의 없는 폐기물 처리시설로 인해 주민들은 알권리도 말할 기회도 없이 건강과 터전을 빼앗겼’다며 폐기물처리시설 추진 및 운영과정에 알권리가 침해됨으로써 감시견제와 주민개입이 어려운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생존권과 환경권의 전제, 알권리
최 위원장의 말마따나 주민들이 자신들의 건강과 삶터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단 정보공개가 필요하다. 주민들을 배제한 채 이뤄지는 개발사업에 대한 결정, 예측 가능한 위험과 실태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비밀주의는 주민들의 생존권과 환경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정보공개와 정보를 기반으로 한 주민참여는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는 전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폐기물처리시설사업계획이 수립되는 초기 단계부터 정보가 공개돼야 한다. 계획들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충분한 설명과 토론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행정의 의사결정과정 역시 공개되어야 한다. 현재 정부나 지자체에서 이뤄지는 허가나 심의과정의 대부분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런 회의들이 공개되고 주민들이 직접 참관하는 것이 주민 참여의 시작이다.
산업폐기물처리시설로 인한 농촌의 환경파괴와 주민들의 건강권침해 실태를 보며 몇 년 전 있던 ‘지역사회 알권리 운동’이 떠올랐다. 2012년 구미불산누출사고 이후 유해화학물질로부터 주민과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지역사회 내 화학물질 정보를 공개하고, 정부와 기업 뿐 아니라 노동자와 주민들도 함께 화학사고에 대한 지역대비체계를 만드는 것을 골자로 한 제도개선 운동이다. 실제 화학물질관리법을 개정하고, 각 지역에 관련조례를 만드는 소기의 성과가 있기도 했다.
지금의 지역사회 알권리운동을 떠올려 본다. 주민들이 무분별한 난개발과 환경파괴를 막고 안전하게 터전을 지킬 수 있도록, 지역의 위험정보를 공개하고 주민참여를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주민들은 배제한 정부와 기업의 밀실결정을 부수고, 주민들이 지켜보고 개입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과정이 공개돼야 한다.
알지도 못한 채 위험을 맞닥뜨리기 전에 주민들이 알고,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10여년 전 지역사회알권리운동이 화학물질관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처럼, 정보공개는 지금의 산업폐기물 문제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알권리는 단순한 정보 접근권이 아니라 농촌 주민들의 생존권과 환경권을 지키는 전제니까.
- 이 글은 민중의소리 [공개사유]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