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가 기록으로 관리하지도 않은 일들
2025년 10월 23일, ‘국가는 어떤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를 주제로 정보공개센터 오픈세미나가 열렸습니다. 9월부터 정보공개센터 정책위원으로 합류한 설문원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가 강연을 맡았습니다. 준비된 자리가 모두 채워진 세미나 현장을 보며, 투명한 사회를 바라는 시민들의 높은 관심과 참여 의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보공개센터는 정보공개를 통해 정부와 권력을 감시하며 시민의 알 권리를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그러나 정보공개가 가능하려면 그에 앞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기록이 없다면 정보공개청구를 하더라도 받아볼 자료가 없을 테니까요. 세미나를 연 정진임 정보공개센터 소장은 “당연히 (기록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있어야 한다 여겼던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국가가 기록으로 관리하지도 않았다고 답변할 때 참 막막하다”며, “어떻게 하면 이 일이 기록으로 남겨져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게 할 것인가가 늘 고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세미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어떻게 기록이 남겨지게 할 것인가
강연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보다 ‘어떻게 기록이 남겨지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습니다. 설문원 위원은 기록관리가 말하는 책임성, 곧 설명책임성(Accountability)을 중심으로 논의를 펼쳤습니다. 설명책임성이란 개인이나 조직이 대내외 이해관계자에게 의사결정과 행위를 근거(기록)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공공행정은 투명성과 책임성을 함께 담보해야 합니다. 투명성을 위한 전략으로 정보공개와 공시제도가 있습니다. 책임성은 때로 투명성과 부딪히는데, 강연에서는 대통령지정기록물제도를 그 사례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일정 기간 비공개를 허용하는 대신 충실한 기록 생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록은 설명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제대로 생산·관리·보유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설명책임성을 방해하는가
설문원 위원은 설명책임성을 방해하는 구조적 문제로 △기록을 생산하지 않는 문제 △업무상 정보를 기록관리 대상에서 배제하는 문제 △‘합법적으로’ 폐기하는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먼저, 기록을 생산하지 않는 문제의 사례로는 2024년 의과대학 학생 정원 배정위원회 회의록을 언급했습니다. 기록이 없다는 것은 해당 행위가 없었다는 뜻과도 같습니다. 미국의 경우, 특정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증거로 삼아 그 사실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존재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연방증거규칙 Federal Rules of Evidence 제803조 7항).
한편 업무상 정보를 기록관리 대상에서 배제하는 문제와 관련해, 2022년 이태원 참사 당시 재난안전통신망 교신 내역은 진상규명을 위한 핵심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으로 관리되지 않고 3개월 만에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설문원 위원은 기관별로 정보관리 규칙이 제각각 운영되며 설명책임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현실을 짚고, 대통령 비화폰과 주요 공직자의 이메일·SNS·홈페이지 등 공공기록이 기록관리 대상에서 제외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었습니다.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으면 기록으로 관리되지 않아 임의로 삭제할 수 있는 관행 또한 현행 기록관리체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공공기록물은 보존기간이 지나면 법에서 정한 절차를 거쳐 폐기됩니다. 그러나 은폐해야 할 기록일수록 보존기간을 짧게 책정하고 기록물평가심의회를 통해 폐기함으로써 형식적 합법성을 확보하기도 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국가기록원장이 폐기 금지를 고시할 수 있으나, 폐기 금지 대상을 각 기관의 자율 판단에 맡기는 등 여러 허점이 있어 실효성이 낮습니다. 효과적인 폐기 금지 제도를 위한 보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누가 설명책임성을 작동시킬 수 있는가
이어서 설명책임성을 뒷받침하는 통제 구조가 제시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공공기록관리체계에서는 기록관의 권한이 약해 실질적인 내부통제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따라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외부통제이며, 이는 전문직 통제·제도적 통제·시민 통제라는 세 축이 함께 작동할 때 힘을 발휘합니다.
전문직 통제는 기록전문가가 설명책임에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록관리자(Records Manager)의 핵심 사명은 기록을 통해 설명책임성을 실현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설문원 위원은 전문직이 자신이 속한 조직을 넘어 사회 전체에 봉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전문가 개인의 윤리적 실천보다 집단적 차원에서의 연대와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제도적 통제는 국회, 감사원, 국가기록원 등 외부기관의 정치적·법적 통제를 뜻합니다. 우리나라는 법률상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을 위한 기록관리를 강조하고 있지만, 여전히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설문원 위원은 회의록 생산 의무 강화, 회의공개제도 도입, 기록 평가제도 개편과 평가·폐기 감독제도 도입을 과제로 제시했습니다. 업무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기록으로 관리하되, 이에 대한 구체적 기록관리기준표를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 SNS라는 기록유형 자체에 기록처분기준서(Records Schedule)를 개발하고, 시민이나 언론의 제보를 받아 내셔널 아카이브가 기관의 무단 폐기를 조사·감독합니다. 또한 공공기록물법에 배치되는 기관 규칙이나 내부 지침을 제도적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시민 통제는 국민, 언론, 시민단체의 감시를 의미합니다. 시민의 참여와 문제 제기가 있어야 기관과 전문직이 설명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질의응답에서는 강연 내용과 관련해 시민 통제에 대한 보완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설문원 위원은 시민의 역할로 정보공개청구를 통한 알 권리 실현을 꼽으며, 공공기관의 부존재 답변 이후에는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공론화와 사회적 통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한 참석자는 공공기록관리 업무의 성격을 단순한 행정지원이 아닌 내부 규제 기능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설문원 위원은 이에 공감하며, 기록관이 대부분 행정지원부서에 속해 있는 한 실질적인 통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밖에도 △국회기록원에 남겨야 할 기록과 시민 입장에서의 국회기록원 설립 필요성 △이태원 참사의 기록화 방안 △12.3 비상계엄과 관련해 국가가 남겨야 할 기록 △국가기록과 민간기록의 바람직한 관계 등 다양한 질문이 다루어졌습니다. 설문원 위원의 당부처럼, 설명책임성이 공허한 행정용어로 머물지 않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또 이처럼 한자리에 모여 그 공허함을 채워가야 함을 느꼈습니다. 이번 세미나는 기록의 존재가 곧 민주주의의 조건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울러 빠른 시일 내에 다음 주제(무엇을 어떻게 남겨야 하는가)로 세미나가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